▲ 자료사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KBS전주방송총국 보도국에서 <생방송 심층토론> 구성작가로 일하다 지난 7월 말 느닷없이 계약종료를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 윤다희(28·가명)씨. 6년 넘게 KBS전주에서 부서를 옮겨 가며 일했던 터라 계약종료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프리랜서라지만 그는 연출을 맡은 기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원고작성부터 잡다한 행정업무까지 상시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았다. 이유 없이 일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한 윤씨는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한 상태다. 윤씨가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핵심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순서 바꿔라” “문구 넣어라” 지시

21일 <매일노동뉴스>가 확보한 윤씨와 담당 기자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면 패널 섭외와 자료조사부터 원고 작성까지 프로그램 제작 과정 전반에서 세세한 지시가 이뤄졌다. 해당 프로그램제작은 토론 주제 선정, 패널 섭외, 원고 작성 순서로 진행됐는데 윤씨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토론 주제를 총괄프로듀서(CP)가 정하면 기자가 섭외 대상자와 인원수를 구체적으로 카카오톡을 통해 지시했다. 원고 작성도 기자가 초안을 작성해 윤씨에게 전달하면 윤씨가 표현 등을 다듬어 보내고, 다시 수정지시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순서를 바꿔 달라’ ‘원고 어느 위치에 특정 문구를 넣어 달라’ ‘질문이 적절하지 않으니 바꿔 달라’ 등 세세한 지시가 수시로 이뤄졌다.

업무지시 범위는 방송제작 관련 행정업무까지 포괄적으로 이뤄졌다. 기자는 카카오톡으로 ‘○○○ 아나운서 자료화면(VCR) 원고를 뽑아서 가져다 달라’ ‘전날 녹화된 심층토론 테이프를 챙겨 달라’ 등의 지시를 내렸다. 패널들이 사용할 ‘머그컵 제작’을 지시하면서 “이거 사라고 총국장이 그러니까 알아봐 주세요. 단가가 높지 않으면 많이 만드셔서 보도국에도 두루 비치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실제로 윤씨는 구성작가 업무와는 무관한 비품 구매나 스태프 계약서류 정리 같은 업무도 맡았다. 기자가 작성해 작가에게 전달한 ‘작가 업무목록’에는 △스태프 1일 계약서 보도국 서무 전달 △상품권 대장정리 및 배송 △상품권·클렌징 물티슈 체크 등이 포함됐다. 윤씨가 입사 5년 만인 지난해 9월 처음 작성한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에는 “방송프로그램에 사용될 원고의 집필, 구성활동 및 사용에 관한 계약”이라는 점이 명시돼 있을 뿐이다. 계약서상 ‘원고집필과 구성활동’ 외에 부가적 업무를 기자의 지시로 떠맡은 것이다.

2015년 8월 KBS전주 편성제작국 라디오 방송작가로 입사한 윤씨는 2019년 11월 보도국 <생방송 심층토론>으로 팀을 옮겼다. 그런데 지난 6월 말 해당 프로그램 CP에게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재계약이 어렵다”고 구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당시 윤씨는 “조직 내 불화” 외에 명확한 사유를 듣지 못했다.

윤씨는 <매일노동뉴스>에 “공영방송사에서는 물품을 버릴 때에도 왜 버리는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며 “그런데 6년간 일한 사람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내쫓을 수 있는지…. 언론사가 오히려 노동권 사각지대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체적·개별적 지시, 프리랜서로 보기 어려워”
사측 “업무시간과 장소, 구속·제재 없었다”

상당한 지휘·감독이 있었는지 여부는 근로자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주된 근거가 된다. 대법원 판례상 근로자성은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는지 같은 ‘형식’이 아니라 근로자가 종속적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했는지 ‘실질’을 살핀다. 종속적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고 업무수행 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는지 등을 종합해 판단한다.

부당해고 사건에서 윤씨를 대리한 김유경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이번 사건은 ‘상당한 지휘·감독이 있었는지’가 아닌 과거 엄격한 판례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지시를 했는지’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A라는 업무 ‘덩어리’를 맡기면서 방식 등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보장하는 게 도급계약의 본질인데 집필뿐만 아니라 실무와 행정업무를 임의로 시킨 점을 감안했을 때 프리랜서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MBC 아침뉴스 프로그램 <뉴스투데이> 방송작가 2명이 MBC를 상대로 지난해 제기한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을 맡았다. 김 노무사는 “MBC 사건과 데일리 프로그램인지 위클리인지 차이만 있을뿐 유기적으로 협업할 수밖에 없는 업무특성은 같다”며 “오히려 종속성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올해 3월 중앙노동위원회는 이들 MBC 방송작가 2명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판정했다. 당시 중노위는 “업무수행 방법의 특성에 비춰 볼 때 생방송 코너 제작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다른 근로자들과 유기적으로 함께 결합해 수행할 필요성이 큰 업무이기 때문에 이 사건 근로자들의 업무만을 따로 떼어 독립된 사업자에게 위탁할 만한 성격의 업무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KBS측은 “(윤씨의) 토론 원고 집필, 구성 결과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다”며 “계약이 만료된 뒤 자동적으로 재계약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 공모를 통해 다시 작가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 공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통보했다”고 밝혔다. 근로자성 여부에 대해서는 “법적·행정적으로 판단할 문제”라며 “다만 생방송이 나가는 날을 제외하고 업무시간·장소 등에 대해 아무런 구속이나 제재가 없었고 근태관리도 받지 않았다”며 “작가 업무 이외의 사적인 일을 지시한 적도 없다”고 반박했다.

당사자측은 이번 주 전북지노위에 출석해 사전 조사를 받는다. 심문회의는 12월 둘째 주에 열릴 예정이다.

KBS전주 홈페이지
KBS전주 홈페이지

여러 명 할 일, 혼자 떠맡는 지역방송 작가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김한별)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지역 방송작가가 제기한 첫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이다.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 수면 아래에서 드러나지 않은 유사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방송국은 본사에 비해 제작비가 적은 탓에 인력이 늘 부족하고 작가들의 노동환경도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한별 지부장은 “지역사에 내려오는 제작비가 적기 때문에 수도권에서는 여러 명이 나눠서 해야 할 일을 지역에서는 작가 혼자 떠맡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사는 인력풀이 적어 부당한 지시 등에 대해 더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구조다. ‘말이 많은 작가’로 입소문이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역방송국 시사교양프로그램에서 일하는 방송작가들은 ‘메인-서브-막내’로 역할을 나눌 것 없이 대부분 ‘1인 1프로그램 체제’라고 입을 모은다. 대구지역 라디오작가 ㄱ씨는 “한 작가가 전체 일을 담당하기 때문에 서브라는 개념이 없다”며 “업무범위는 넓지만 경력 20년이 넘어도 월급이 대부분 200만원 선에 맞춰질 정도로 처우는 열악하다”고 말했다. 업무범위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담당 PD의 업무지시는 상시적으로 이뤄지고 계약서에 적시되지 않은 부가적 업무를 맡는 일들도 비일비재하다. 춘천지역에서 일하는 작가 ㄴ씨는 “제작비 부족으로 협찬 따오는 일도 하고 현장 인력이 부족해 조연출 업무를 맡곤 한다”며 “아이템 선정부터 섭외, 집필 과정에서 PD의 지시는 ‘당연히’ 이뤄진다”고 증언했다. 대전지역에서 일하는 작가 ㄷ씨는 “맡고 있는 프로그램과 무관한 기획안을 써 달라고 하거나 다른 프로그램 PD가 업무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며 “부탁이라고 해도 지역에서 계속 일하려면 이를 거절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전했다.

방송작가지부는 지난 8월 지역 방송작가의 처우개선을 공식 테이블에서 논의하자며 KBS와 MBC에 직접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방송사측은 교섭이 아닌 ‘방송작가특별협의체’를 통해 논의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MBC는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첫 공판은 한 차례 연기돼 다음달 16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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